문화일반
이건용의 '여기', 미술이 된 철학적 몸짓
예술의 정의를 뒤흔든 마르셀 뒤샹의 소변기 '샘'으로부터 시작된 개념미술의 거대한 흐름이 한국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이번 전시는 시각적 아름다움에 천착하던 과거의 틀을 깨고 작가의 아이디어와 철학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동안 단색화나 실험미술의 그늘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한국 개념미술의 계보를 복원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깊다.전시의 도입부는 언어와 논리, 그리고 신체 행위가 결합된 1970년대 실험적 작업들이 장식한다. 한국 실험미술의 거장 이건용은 '장소의 논리'를 통해 동일한 공간이라도 인간의 움직임과 지시 언어에 따라 관념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작가가 원 안팎을 오가며 외치는 '여기'와 '저기'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존재의 위치를 규명하는 철학적 행위가 된다. 이는 미술이 눈으로 보는 재현을 넘어 사유의 구조를 만드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사물과 언어의 불완전한 관계를 파고든 섹션에서는 기존의 의미 체계를 뒤트는 재치 있는 작업들이 눈길을 끈다. 김홍석은 개념미술의 고전인 조지프 코수스의 의자 작업을 변주하여 '친구'라는 추상적 개념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실제 인물과 사진, 그리고 사전적 정의를 나란히 배치한 이 작업은 우리가 믿고 있는 언어적 정의가 실제 대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며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도와 시계 같은 측정 체계에 대한 불신도 작품으로 형상화됐다. 곽덕준은 네 개의 시계가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게 함으로써 시간이라는 절대적 기준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이는 세계를 규정하는 인간의 시스템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관람객들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도구들이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낯설게 변하는 과정을 목격하며 고정관념의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사회적 기호와 권위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영상 작업들은 전시의 메시지를 더욱 확장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인터뷰 형식을 빌린 김홍석의 '더 토크'는 가짜 언어와 자막을 활용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정보의 형식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꼬집는다. 인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인터뷰라는 권위적 형식을 비풂으로써, 대중이 매체를 통해 수용하는 사실의 실체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질문한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한국 개념미술을 세계 미술사 안에서 새롭게 위치시키기 위한 연구를 지속할 방침이다. 난해하다는 편견을 넘어 작가의 머릿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지도를 따라가는 이 여정은, 관람객들에게 시각적 즐거움 이상의 지적 유희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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