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이강소 화백, 먹빛 지우고 붉은색 입혔다

 한국 실험미술 1세대를 상징하는 거장 이강소 화백이 반세기 넘게 천착해온 '생성'이라는 화두를 들고 대구 리안갤러리를 찾았다. 이번 개인전 '생성의 장'은 작가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를 회화와 조각 등 다채로운 매체로 풀어낸 자리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동안 작가의 화면을 지배했던 먹빛과 여백의 미학 위에 붉은색과 연분홍, 옅은 청색 등 감각적인 색채가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정된 실체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의 상태를 탐구해온 작가의 예술적 여정이 한층 자유롭고 유동적인 단계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이강소는 1973년 전시장 안에 실제 선술집을 차려놓은 파격적인 퍼포먼스 '소멸-바에서의 하루'로 한국 미술계에 거대한 충격을 던졌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회화와 설치, 조각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들은 작가가 통제하는 결과물이라기보다 붓질의 흔적과 물감의 흐름,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이 우연히 만나 형성된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작가에게 작품이란 완결된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상태를 의미한다.

 


화면 속에는 이강소의 작업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오리와 사슴, 배의 형상이 여전히 등장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이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 형상을 억지로 구축하려 하기보다는 캔버스 위에서 벌어지는 유희적인 붓질이 화면 전체를 주도한다. 새롭게 도입된 다채로운 색채들은 '생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보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관람객들은 옅은 청색과 분홍빛이 교차하는 화면을 통해 존재가 태동하고 변화하는 생명력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함께 전시된 조각 작품들 역시 회화와 궤를 같이하며 작가의 철학을 입체적으로 투영한다. 인위적으로 형태를 빚어내기보다는 재료와 시간, 공간이 상호작용하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회화가 평면 위에서 벌어지는 붓질의 사건이라면, 조각은 공간 속에서 물질이 점유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서로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두 작업 모두 고정된 의미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존재의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리안갤러리 측은 이번 전시가 이강소의 예술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라고 설명한다. 작가가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재료와 공간,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겸허히 수용하는 태도가 작품 곳곳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거장의 손끝에서 탄생한 신작들은 관람객들에게 예술이 단순히 감상의 대상을 넘어 하나의 생성되는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의 유연한 사고와 실험 정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하고 있다.

 

거장의 새로운 시도가 담긴 이번 전시는 오는 7월 11일까지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대구 미술계는 이번 전시가 지역 문화 예술의 깊이를 더하는 동시에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현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붉은 빛과 연분홍색이 스며든 이강소의 새로운 '생성의 장'은 그가 평생을 바쳐 탐구해온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가장 최신의 답변이자,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과도 같다.